프랑스 희곡의 정수를 심는, 극단 ‘프랑코포니’ 대표 임혜경 명예교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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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커뮤니케이션팀
- 인터뷰자
- 작성일 2026-04-06
- 극단 프랑코포니 대표, 임혜경 명예교수(불어불문72) 인터뷰

1976년 학사모를 쓰고 숙명의 교정을 나섰던 불문학도 임혜경 동문(불어불문72)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최초의 동문 교수로 돌아와 33년 6개월간 강단을 지키고 정년을 맞이했다. 현재는 명예교수로서 숙명과의 인연을 이어가는 한편, 극단 ‘프랑코포니’ 대표로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현대 희곡을 발굴해 공연으로 선보이는 데 힘쓰고 있다.
프랑스어 희곡을 한국의 연출가와 배우들이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함께 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좋아하는 일’을 향한 끈기 있는 도전이 인생을 어떻게 확장하는지를 보여준다. 임혜경 명예교수의 여정을 숙명통신원이 직접 들어봤다.
1. 안녕하세요.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명예교수 임혜경입니다. 숙명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부터 2019년까지 모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로서 봉직했습니다. 재직 기간 동안 문과대학장, 대학원장, 한국불어불문학회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문학번역상, 프랑스정부교육훈장(PA)을 받은 바 있습니다. 2009년부터는 ‘프랑코포니’라는 불어권 극단을 창단해 공연을 해오고 있습니다.
2.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학자의 길을 선택하신 계기와 과정, 모교 불어불문학과에서 ‘최초의 동문 교수’로 후배들을 가르치며 보낸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대학 3~4학년 무렵 졸업 이후의 장래에 고민이 많았어요.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난감했었죠. 무얼 좋아하느냐 하는 질문에도 쉽게 답을 못하는 몰개성한 자신을 자책만 하다가, ‘내가 선택한 전공이 나에게 맞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해 여름방학에 여승들이 사는 충남 수덕사로 한 2주간 책을 싸 들고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전공책을 폈는데, 시험 때만 억지로 봤던 책을 발심이 나서 읽으니 얼마나 쏙쏙 들어오고 재밌든지요. 불문학은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더 해보고자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석사를 마친 뒤에는 더 공부하고 싶다는 갈증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고, 학위를 끝내고 돌아와 모교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첫 불문과 동문 교수로서 큰 혜택을 입었고, 후배인 제자들을 가르치며 즐거움과 큰 보람을 느꼈으며 저 또한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3. 연구를 넘어 직접 극단을 창단하고 연극 제작에 뛰어드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번역이 공연 제작까지 이끈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한국문학 번역지원 초기, 소설이나 시 번역은 나오는데 연극 분야는 전무한 상태인 것을 보면서 공역자와 연극을 번역해 보자고 의기투합하여 시작한 것이 ‘연극’에 뛰어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번역해 둔 작품이 조금씩 쌓일 무렵, 옆에서 공연하자는 제안이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2001년에 여성연출가전에서 공연 제작을 한번 해보게 되었죠. 한번 해보니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 있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싶어 그만두었는데, 2009년에 또 공연 제의를 받게 되었어요. 이때는 제대로 해보자 싶어 본격적으로 극단 이름을 만들고 창단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극단 프랑코포니에서 선보인 공연들의 포스터 앞에서
4. 평생 프랑스 연극을 한국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특히 퇴임 후에도 '극단 프랑코포니'를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신데, 교수님을 계속 무대로 이끄는 연극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극단 프랑코포니’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동시대 불어권 작가의 작품을 발굴하여 번역-출판-공연하는 극단입니다. 외국 영화도 국내에 바로 들어오는 초 스피드 시대에, 연극은 왜 지금 여기의 문제를 바로바로 알 수 없을까, 저쪽 다른 나라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같이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은 없을까를 고민하며 새로운 작품을 찾고 있지요.
극단 대표로서 볼 땐 극단 운영의 현실적인 어려움에 휘청이기 일쑤지만, 극단의 공연을 번역하는 번역자로서는 배우들과 연습실에서 같이 지내며 출판 마감 시간까지 번역 수정을 할 수 있어 좋습니다. 저희 극단의 대본은 모두 연습실에서 배우들의 입을 거쳐 나온, 공이 많이 들어간 번역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창작하는 예술인과의 교류도 즐겁고, 제가 하는 공연 제작이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연극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5. 지난 1월, ‘안락사’라는 다소 묵직한 주제의 <취리히 여행>을 무대에 올리셨습니다. 자칫 예민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연극을 통해 우리 사회에 던지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이미 출판된 대본을 찾아 공연을 올리는 대부분의 극단과는 달리, 우리 극단은 새로운 작품을 찾아 번역해서 무대에 올립니다. <취리히 여행>이라는 작품을 읽고,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에 관한 담론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으니 지금 이 시대에 대한 감수성, 호소력,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이 극은 죽는 사람, 죽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 삶을 찬미합니다. 극 중 대사에도 나와 있지만 “산자는 죽은 자의 눈을 감기지만, 죽은 자는 산자의 눈을 뜨게 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많은 관객이 감동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가 되었다고 말해 줄 때 보람을 느낍니다.

6. 올해 11월 아르코예술극장과 공동 기획으로 조엘 폼므라의 <이야기와 전설>을 준비 중이십니다. 원어 공연 이후 한국어 버전으로 다시 올리게 된 계기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2024년 LG아트센터에서 프랑스어 공연 당시 한국어 자막 번역자로 참가했던 계기로 이 작품을 번역하게 되었고, 대관 선정과 공동 기획 제안까지 이어져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이번 한국어 버전 공연으로 이어진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과 똑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과 청소년이 삶을 공유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형성해 가는 청소년들의 정체성과 사회에 대한 반항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다루는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은 전혀 아닙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을 통해 우리가 ‘가족’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7. 하나의 언어라도, 불문학자로서의 언어와 연출가로서 마주하는 언어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질 것 같습니다. 하나의 텍스트를 두고 이 두 정체성이 충돌하거나 고민하셨던 지점은 없으셨나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한 교수님만의 노력도 듣고 싶습니다.
연출가는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번역자로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 단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아니죠. 번역은 작품의 정서와 인물에게 깊이와 두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희곡 번역은 배우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발화되어야 하므로, 배우들의 연습을 지켜보며 대본을 수정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죠. 대부분의 번역자는 공연을 앞둔 연습실에 이만큼 붙어있지 못하지만, 저는 연출가와 배우 사이를 오가며 무대 언어가 되도록 수없이 확인하고 수정합니다.
배우들은 이미 대사 속에서 공간을 느끼고 움직임을 미리 생각하지만, 저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연습 과정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대사가 자연스럽지 않거나 이해가 어렵다면 원작의 범위 안에서 함께 찾아가면서 해결하는 일이 반복되죠. 이렇게 연출가와 배우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무대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번역자로서뿐만 아니라 드라마투르그*로서 작품의 질을 온전히 보장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느낍니다.
*드라마투르그(Dramaturg): 연극이나 공연의 ‘내용과 맥락’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연출가와 배우들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

8. 학생 시절의 숙명과 교수로서 마주한 숙명, 그리고 지금의 숙명은 다 다른 모습일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보신 우리 대학의 가장 자랑스러운 변화나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세계가 급변하는 시대에 숙명 역시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전통적인 여대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취적이고 글로벌한 분위기로 발전했고,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졸업생들이 늘어나는 것 역시 이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가치도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숙명인의 성실함과 학교에 대한 애정입니다. 재학생이든 졸업생이든, 교직원이든, 모두가 학교를 사랑하고 학교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숙명의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9. 마지막으로, 교수님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숙명의 후배들에게 조언 부탁드립니다. 특히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예술계 진출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지금처럼 급변하는 시대에 한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정말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빨리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죠. 또한 이후에 실력을 쌓고, 필요한 자격과 경험을 확보하며, 적어도 10년 이상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역량을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자리를 잡은 뒤에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존경받는 리더, 그리고 숙명을 대표하는 전문인이 더 많이 배출되기를 희망합니다.
취재: 숙명통신원 기획취재팀 24기 조성연(경영학부 25), 홍신영(문헌정보학과 24)
정리: 커뮤니케이션팀



